50년 전 사이공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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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강 미국이 베트콩에게 어떻게 무너졌나"...50년전 사이공 함락 본 외교관의 징비록
정지섭 기자 2025.04.20. 13:00
50만명 투입하며 압도적 화력 과시한 미국. 지형지물 익숙한 베트콩에 번번이 밀려
정확하고 신속한 뉴스가 오히려 미국 반전여론 불러
1975년4월30일 북베트남군 진격에
미군 병력과 미국 외교관들이 긴급탈출하고 남베트남 수도였던 사이공이 함락됐다.
1964년8월 통킹 만에 정박 중이던 미군 구축함이 북베트남 어뢰에 피격 당한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참전했던 베트남전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북베트남이 무력통일을 완수한 사이공 함락 50주년을 앞두고
베트남에서 ‘베트남 남부해방 및 국가통일 50주년’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경축행사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베트남전 끝무렵 초임 외교관으로 현장에 있었던 미국의 원로 외교관이
세계최강 미군이 어떻게 베트남전에서 패전했는지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녹여넣은 징비록(懲毖錄)을 썼다.
사이공 함락 하루 전인 1975년4월29일 사이공 주재 미대사관 건물 옥상이 탈출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미 국무부 Hubert van Es
미국 전·현직 외교관들의 협의체인 미국외교관협회에서 발행하는 외교 월간지
‘포린 서비스 저널’ 최신호에 수록된 ‘뗏 대공세-미국을 바꾼 여섯시간’이다.
필자 케네스 M 퀸(83) 전 캄보디아 주재 미국 대사는
스물여섯 살이던 1968년 베트남 근무를 시작으로 국무부에서 32년간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당시 베트남 정치·사회 상황을 가까이서 지켜봤던 그는
이 전쟁이 사실상 미국의 패배로 급격히 기울던 변곡점을 사이공이 함락되기 7년 전인 1968년1월로 꼽았다.
그리고 압도적 우위의 무기와 50만명이 넘는 병력을 파병한 미국이 어떻게 패퇴하게 됐는지를 짚어냈다.
1968년 베트콩의 뗏 데공세 당시 군시설 사수에 나선 미군의 모습. /미 육군
그가 꼽은 변곡점은 구체적으로 1968년1월30일 벌어진 베트콩들의 사이공 주재 미국대사관 침투사건이다.
공식 명칭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인 베트콩은
1960년2월 남베트남 내 공산당 추종 세력이 주축이 돼 결성된 무장 게릴라다.
퀸은 이 사건이 벌어지기 전의 미국 상황에 대해
“2차 세계대전 승리, 케네디 대통령의 우주개발 계획 등으로 미국사회 전반에 자부심이 가득 했다”며
“(케네디의 암살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존슨의 재선이 유력해 보였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지지여론도 확고했다”고 했다.
하지만 설날연휴 기습적으로 행해진 베트콩의 공격은 이런 미국 내 기류를 바꿔놓았다.
1968년1월 베트콩의 뗏 대공세로 주둔기지가 위협을 받자 미군용기가 방어차원에서 긴급 이륙하고 있다.
/미 국방부
뗏(음력 설)은 베트남 최대의 명절이다.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에게 총구를 겨눴지만, 명절연휴만큼은 휴전한다는 관행이 있었다.
무신년 원숭이해의 공식적인 시작을 앞두고 명절 분위기가 물씬했고, 베트콩은 이 틈을 노렸다.
베트콩과 이들을 지원하는 북베트남군이 뗏 휴전을 깨고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특히 베트콩 대원 20명이 사이공 미 대사관으로 침투한 사건은 미국에 충격을 줬다.
이른바 ‘뗏 대공세’로 알려진 이 공격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이뤄졌다.
퀸은 “사이공을 포함한 남베트남의 모든 주요 도시에서 벌어진 전투장면을 담은 영상이
즉시 미국 전역의 수백만 가구에 TV를 통해 전달됐다”고 했다.
베트콩의 뗏 대공세 당시 응사를 준비 중인 미군. /미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DPAA)
이 사건이 벌어질 당시 스물여섯살의 신참 외교관이었던 퀸은
험지(險地)로 꼽혔던 베트남 파견근무를 앞두고 베트남어 학습과 전투훈련 등을 받고 있었다.
퀸은 국무부 동료의 증언과 기록을 바탕으로 베트콩의 미대사관 침투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풀어냈다.
1월31일02시45분 20명의 베트콩이
지은지 얼마 되지 않은 대사관 외벽에 구멍을 뚫고 대사 집무실이 있는 본관으로 돌진했다.
방탄문 때문에 본관 침투가 막히자, 베트콩들은 구내를 돌아다니다 일부는 부속건물로 침입했다.
뗏 대공세 당시 미군이 입은 피해를 조명한 방송물 커버. /미 육군
그곳에 머물고 있던 대사관 직원 조지 제이크 제이콥슨은
경비병이 던져준 권총을 받아 자신에게 달려드는 베트콩의 얼굴에 총을 쏘았다.
제이콥슨은 그 해 11월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베트남으로 부임한 퀸의 상관이 됐다.
침투한 베트콩이 전원 사살되면서 사건은 여섯시간 만에 마무리됐다.
엘스워스 벙커 당시 남베트남 주재 미국 대사는 상황이 통제됐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서방국가 기자들을 대동하고 현장을 시찰하며 모든 장면을 기록했다.
당시 현장상황이 화면과 기사를 통해 미국 전역에 생생하게 보도됐다.
이 상황에 대해 퀸은 이긴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베트콩이 활용했던 지하 터널의 단면 개념도. /미 극동공병단
그는 “전술적으로 볼 때, 대사관 공격은 실패로 간주됐지만,
전략적으로 볼 때 미국의 심장부인 외교공관이 뚫린 것은
북베트남이 당시 벌인 공세 중 가장 충격적이고 파괴적이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이 사건이 미국 TV와 신문 등에 생생하게 보도된 게 미국에는 독(毒)이 됐다.
베트남전 전쟁수행에 대한 미국국민의 신뢰를 약화시켰고,
전쟁에서 승리하려는 국가적 의지의 침식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퀸은 “50만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사관조차 보호할 수 없다는 인식이 미국 전역에 퍼져나갔고,
전쟁강경파들 조차 상황에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당시 존슨 대통령과 웨스트모어랜드 주 베트남 미군총사령관이
승산없는 전쟁에 미국인을 심각하게 오도했다는 우려가 증폭되었다는 것이다.
미 해병대원들이 차 위에 앉아 쉬고 있다. /National Archive
당시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던 방송기자인 CBS 소속 크롱카이트의 베트남 현장취재 보도는
미국의 반전여론에 본격적으로 불을 붙이면서 미국정부를 더욱 난처하게 했다.
당시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뗏 대공세를 현장취재한 크롱카이트는
“전쟁은 수렁에 빠져 있고, 미국민은 지도층의 근거 없는 낙관론에 속고 있다”며 존슨 행정부를 저격했다.
그러면서 “지금 필요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협상”이라고도 주장했다.
퀸은 크롱카이트의 보도를 회고하면서
“그가 미군의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내쉰 한숨은
재선을 노리던 존슨 대통령에게 비수가 됐다”고 회고했다.
결국 지지율이 폭락한 존슨은 재선 도전을 포기했다.
퀸은 들뜬 명절 분위기를 틈타 방심한 사이 단행된 북베트남·베트콩의 대공세,
그리고 베트콩이 자신들의 목숨을 버려가며 자행한 미 대사관 공격이 가져온 파급효과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뉴욕은 세계상업의 수도가 됐고, 워싱턴DC는 세계 군사와 외교의 중심지였으며,
미국은 곳곳에 만연한 공산주의를 막아내는 보루로 여겨졌다.
그러다 발생한 일련의 비극 속에서 승리자로서의 미국의 지위는 무너졌다.”
퀸은 베트남어 교습과 함께 전투훈련까지 받은 뒤 1968년10월 첫 임지 베트남에 부임했다.
신참 외교관이었던 그는 현장 분위기를 통해 이미 패전을 예감했다.
압도적 병력과 화력을 가진 미군들에게서 사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의 당혹감을 퀸은 이렇게 풀어냈다.
“나는 파병된 미군들 사이에 ‘나는 베트남에서 마지막으로 죽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태도가
전염병처럼 빠르게 확산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런 분위기는 징집병들 사이에서 군기와 사기를 저하시켰다.”
사이공이 함락되기 2년전인 1973년 미군과 북베트남 사이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미군의 철수는 이미 진행상태였다.
예정된 결말이라는 측면도 있는 셈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쫓기듯 사이공을 떠난 미국의 모습은 깊은 그림자를 남겼다.
사이공 함락 전날인 1975년4월29일,
헬리콥터를 타고 대사관 건물 옥상에서 진격하는 북베트남군을 피해 도망치는 미국 대사의 모습은
‘미국에 대한 최후의 일격’이라고 했다.
퀸은 “아울러 그것은 7년전인 1968년1월 그날 밤,
20명의 베트콩이 미 대사관 구내로 침투하면서 시작된 7년간의 정치적 격변의 정점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간결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징비록을 마무리한다.
‘미국이 완전무결하다는 생각은 뒤집어질 수 있다. 분열된 미국은 패배할 수 있기에.”
정지섭 기자
용띠 해에 태어났지만 곰이나 돼지를 닮았다는 소리를 종종 듣습니다.
대학에선 역사를 배웠고, 군대에선 주로 군기지 경비를 섰습니다.
신문사에 들어온 뒤 어느 한곳 깊게 파지는 못했지만,
널찍하게 다양한 분야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글로 썼습니다.
지금은 지구촌 소식을 전하는데 손을 보태면서 틈틈이 동물(신문)과 짐승(인터넷) 얘기도 전하고 있습니다.
제 글을 읽는 여러분의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 속에 막힌 무언가가 뻥 뚫렸으면 좋겠습니다.
댓글목록
최고관리자님의 댓글
최고관리자 아이피 115.♡.168.73 작성일
거지와 신사가 싸우면 무조건 신사가 진다
거지는 체면불구에 더 잃은 게 없는 약자고
신사는 대외적으로 이거저거 챙겨야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민군 상관없이 무차별 공격을 했어야 했다
지금도 중동전쟁터에서 민간인피해라는 장애에 공격을 제대로 못하고
애궂은 군인만 피해를 보고 있어 반전여론이 높다
정치꾼과 관료와 언론기자는 스파이와 비슷하다
국익보다 자신과 조직의 입지가 우선순위에서 앞서기 때문이다
선거와 독자 확보를 목표로 국민 궁금증을 풀려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