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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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초기의 관료.
태종 이방원의 측근으로 이방원을 왕위에 올린 핵심 인물 중 한명이다.
1차 왕자의 난에 참여하고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했다는 점과
여말선초를 다룬 사극에서 갑주를 입고 무인처럼 등장하는 경우가 많아서 무관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조선 최초의 문과 급제자로 엄연히 문관이다.[2]
2. 생애[편집]
1373년 아버지 이경과 어머니 영양 남씨 남휘주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으로 이중번이 있었다.
이경과 결혼하기 전 윤공의 아내였던 남씨는
윤공이 죽은 후 두 아들 윤자량과 윤자당을 데리고 이경에게 재가하여 이숙번을 낳았는데
윤자량과 윤자당은 이숙번의 이부형이다.
성현의 수필집 <용재총화>에 따르면 이런 전설이 있다.
이숙번이 태어나기 전
이숙번의 이부형 윤자당이 7살 때 어머니 남씨를 따라 무당집에 가서 운명을 물어보았더니
무당은 윤자당이 귀한 상인데 반드시 동생의 힘 때문에 귀함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
남씨가 과부의 아들이 어찌 동생을 얻을 수 있냐고 묻자
무당은 남씨가 재혼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정말로 남씨는 이경에게 재가하여 이숙번을 낳았다.
이숙번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지략이 있었으며 기억력이 비상했다고 한다.
1393년(태조 2) 生員으로 조선 최초의 식년시 문과에 병과 7위로 급제했으며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의 주선으로 맨 처음에 이방원을 만났을 때 자신을 돕겠냐는 이방원에게
"그런 일쯤은 손바닥 뒤집는 일보다 쉬운 일이다."라면서 패기있는 대답을 하여 이방원을 만족시켰다고 한다.
이후 지안산군사[3]를 지내는 중에 1398년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경복궁으로 병력을 출동시켰고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이 공으로 정사공신 2등에 봉해지고
오늘날 대통령비서실의 성격을 띠며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승정원 우부승지에 제수되었다.
이숙번을 승정원에 배치한 것은 정종을 감시하려는 태종의 계산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후에도 이방원의 충실한 수족으로서 2차 왕자의 난에 참여하여 좌명공신이 되었다.
조사의의 난에서도 진압군을 지휘해 반란군 잔당을 격파했다.
태종이 왕이 된 이후
이숙번은 태종과 각별한 사이로서 거의 안하무인의 권세를 누렸고 그 사례들이 실록에 남아있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풍수가 최양선의 상소로 한양도성의 기존 동-서 통행로를 바꾸는 과정에서 서문을 새로 만들게 되었는데,
새 문 후보지가 이숙번 집 앞 길을 지나가게 되자
이숙번이 압력을 행사하여 새 문의 위치를 상왕 정종의 궁궐인 인덕궁 앞으로 옮겨버렸다.
이 문은 서전문(西箭門)이라고 한다.
아무리 정종이 바지사장이라지만 이성계의 사실상의 장남이자 상왕이자 현 국왕의 형이었다.
하지만 내 집 앞이 조용할 수 있다면 상왕 집 앞이 시끄러워도 상관없다는 자세를 유지했다.
생각해보면 단순히 예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집 앞에 문 놓기 싫다고 상왕 집 문 앞으로 바꿀 정도로 힘이 셌다는 것이다.
결국 이숙번 추방 이후 1422년(세종 4) 진행된 새 도성 공사에서
서전문은 없어지고 이숙번의 옛 집 길 앞으로 새 돈의문이 세워졌다.
야사에서는 아예 이숙번의 집이 처음부터 돈의문 안에 있었는데
한양의 큰 성문이니 당연히 사람들이 오가고 우마 소리가 들리는게 인지상정이지만
이숙번은 시끄럽다고 하며 서대문을 틀어막아 버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한양의 백성들은 이숙번의 집을 성문을 막아버렸다고 하여 "색문가"라고 부르며 손가락질했다고 한다.
백성들의 원성에 조정에서 새로 성문을 만들어서 불편을 덜어주려고 했는데
어떻게 계획을 짰는지 하필이면 그 문으로 가는 길도 이숙번의 집 앞을 거치게 되었다.
그러자 이숙번은 친절하게도
"인덕궁 앞에 작은 동네가 있는데 거기가 길을 내고 문을 세우기에 적합하다"라고 하자
조정이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기록을 따라가면
도성의 기존 동-서 통행로가 바뀌면서 기존의 서문 대신 정종의 궁 앞길 경로를 따라 새 문이 세워졌다가
다시 세종 때 기존 후보지였던 이숙번 집 앞 경로로 이전된 것이므로
태조 때의 옛 돈의문, 태종 때의 서전문, 세종 때의 새 돈의문은 모두 위치가 달랐다.
그런데 태조 때와 세종 때 서문의 이름이 똑같고
새 돈의문이 이숙번의 옛 집 앞 길을 따라 지어졌기 때문에
마치 원래부터 돈의문이 이숙번의 집 앞에 있었던 것처럼 되어
기존의 문을 막아버린 장본인으로 와전된 것이다.
그러나 앞뒤 정황이 약간 다를 뿐
이숙번이 상왕 정종을 대놓고 무시하는 데도 아무도 비난하지 못한 것은 실록과 일치한다.
좌찬성으로 있을 때
태종이 형이자 상왕인 정종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고 배웅하러 갔는데
이숙번이 하륜과 함께 의정부 관리들과 풍악을 울리는 등 무례한 행동을 하자,
사간들은 신하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니 이숙번과 하륜에게 벌을 주라 간청했고 태종은 이를 만류하였다.
이에 화가 난 이숙번은 하륜과 함께 자신들을 탄핵한 사간들을 벌주라고 임금께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숙번의 이 행동은 임금의 잘못을 직언하는 것은 올바르고
자신들의 잘못을 탄핵하는 것에 대해 벌하라는 어이없는 이중잣대나 다름없어서
정승이었던 성석린과 남재는 동참을 거절했다.
하지만 이숙번은 그 날 밤 성석린의 집과 남재의 집에 방문하여 상소에 이름을 쓸 것을 반협박조로 재촉하였다.
한두 가지가 아닌 이숙번의 행패는 태종의 귀에도 들어갔지만,
공신이어서 그런지 태종은 그때마다 이숙번을 비호했다.
그러나 이렇게 이숙번을 매번 감싸준 건 아직 두고 보자는 것이었지,
태종도 자신의 형이자 상왕인 정종에게 오만불손한 이숙번을 좋게 봤을 리 없다.
훗날 이숙번을 숙청하고 난 후 세종에게 절대 이숙번을 복귀시키지 말라고 신신당부할 정도면
왕권 강화에 열을 올린 태종으로서는 이숙번에 대해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아래에서 보았듯 근본적으로는 이숙번이 미래권력을 쥐지 못하기 위함이겠지만 말이다.
한 번은 맹인 중이 사대부 가의 과부와 간통한 일이 있었다.
온 조정의 여론은 중과 과부 모두 참수하자는 쪽으로 몰렸지만,
이숙번은 법에 따르면 곤장을 쳐야 한다며 살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안이 워낙 충격적이다보니 여론에 밀려 결국 둘 다 참수형에 처해진다.
이에 불만이 쌓인 이숙번은 궁궐에 나오지 않고 태종의 부름조차 무시하여 태종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후 세자 이제를 찾아가서
"여론에 밀려서 사람을 억울하게 죽였으니 이런 미친 짓이 어디있겠냐"며 국정을 비판하다
태종을 간접적으로 비판했고 이게 태종의 귀에 들어갔다.
한때 자기 밑에 있었던 박은이 우의정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에 은근히 불만을 표시했고 이것 역시 태종에게 보고되었다.
이 사건을 보면 많은 행패와 패악질을 부린 이숙번이
의외로 사람 목숨을 소중히 여겨 2명의 처형에 반대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고작 간통 가지고 사람을 처형하기까지 하는 조선의 법에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숙번이 재가녀의 자식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가정사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숙번은 중과 간통한 과부를 보고
아들 2명 딸린 몸으로 아버지와 재혼해서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떠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허나 사정이 어찌됐든 태종과 조정의 눈밖에 난 이숙번의 정치인생도 점점 저물고 만다.
1416년은 가뭄을 비롯한 재해 때문에 분주한 시기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 이숙번은 병을 핑계로 여러 달 궁궐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태종이 그 동안 쌓여온 불충, 불경죄를 끄집어내서
이숙번을 연안부의 농장으로 보내고 공신 녹권과 직첩을 회수했다.
이 때 정승과 대간이 한 몸이 되어 이숙번을 탄핵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태종은
이숙번은 천성이 거칠어 가끔 무례한 짓을 할 뿐이지 나쁜 놈은 아니라는 이유를 대며 추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뒤 1417년 세자 이제가 사고를 치고 근신하던 중에
선공감의 비리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온 구종수 형제가 후일을 도모하려고
세자궁의 담을 넘어서 들어가면서까지 세자에게 주색을 제공했고 비단을 뇌물로 바치기도 한 사건이 일어났다.
안 그래도 세자가 사고를 쳐서 골치가 아프던 태종에게 이 사건은 불을 지르기에 충분했고,
구종수 형제는 다시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별 일 아닐 수도 있지만 태종이 이렇게 격노했던 이유는
세자에게 뇌물을 주고 후일을 도모하려고 했던 발상 자체였다.
구종수 형제는 유배를 가서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세자께 말과 활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이숙번에게 보냈다가 그대로 이숙번의 발목을 잡아버린다.
매번 이숙번을 감싸줬던 태종도 이번에는 이숙번을 지방에 안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간은 과거 민씨 형제들과 이거이 부자의 전례를 생각했는지 이숙번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태종은 이숙번을 함양으로 유배 보낸 뒤 죽을 때까지 찾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태종이 자신의 최측근인 이숙번을 유배 보낸 것은
최측근까지도 내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역시 말썽이 많았지만 세자와 엮이지 않았고 나이도 많았던 하륜과는 달리,
이숙번은 40대의 창창한 나이였고
태종이 죽은 이후 세자를 가지고 놀 소지가 있었기에 왕권에 위협이 되는 요소였다.
태종은 죽기 전 세종에게
"이숙번은 내가 죽더라도 절대로 유배를 풀어주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고 승하했다고 하는데
세종 역시 이 말을 따라 이숙번의 유배를 풀어주지 않았다.
1438년(세종 20) 헌릉 비문 중에서 왕자의 난을 언급한 내용이 문제가 되자
이숙번이 태종의 최측근이라 태종의 예전 일을 잘 알기 때문에
세종은 자료수집 차 잠시 이숙번의 유배를 풀어서 이숙번을 한양으로 올라오게 했다.
왕자의 난 당시의 기록이 부정확하고 세종 자신이 아는 일도 많이 누락되어 있었기 때문.
1차 왕자의 난과 2차 왕자의 난 모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 중 이방원 본인이나 하륜, 이거이와 이저 부자, 조영무,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 등
다른 핵심 인물들은 모두 죽은 뒤였기 때문에
이 때 살아있던 사람 중 그 때 상황을 직접 겪은 사람은 이숙번 뿐이었다.
그가 하는 일은 매일 경연청으로 출근해서 당시 일을 구술하는 것이었는데,
이숙번은 그 때도 전혀 예전의 잘못은 뉘우치지 않고 안하무인으로 굴었다고 한다.
이숙번은 은근히 세종이 자신을 다시 등용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지만 딱 그걸로 끝이었다.
청취 조사가 끝난 뒤
세종은 이숙번의 함양 유배조치를 풀어 이숙번을 한양 근처인 경기에서 자유롭게 살도록 조치해줬으나,
끝내 그를 정계로 복귀시켜 주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숙번이 죽기 전까지 함양 유배지로 다시 돌려보내야 한다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던만큼
유배지로 안 돌려보낸 것만으로도 이숙번 입장에선 감지덕지.
이후 이숙번은 2년 후인 1440년(세종 22) 67세의 나이에 병사했다.[4]
세종도 상소가 하도 올라오자 첨엔 '아픈 사람 또 유배 보내면 안된다'고 상소를 물리치다
결국에는 '병이 나으면 돌려보내겠다'라고 무마했으나,
이숙번이 끝내 병을 못 이기고 사망하면서 그럴 일이 없게 되었다.
3. 평가[편집]
이숙번은 조선 최초의 문과에 급제하고 군사에도 밝은 문무겸비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태종의 최측근으로서 언행을 절제하지 못하고 설치다
결국 상기한 몇몇 사건이 얽혀 남은 생을 유배지에서 보내고 만다.
정종에게 무례했을 당시만 해도 이숙번이 눈 밖에 났지만
정종의 권위를 굳이 드높일 것도 아닌 태종이었기에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세자 양녕은 태종의 역린이었다.
그런데 이숙번이 양녕 곁에서 자기를 간접 디스했다는 소식까지 들리니,
태종 입장에선
아직 한창 나이인 이숙번이
후에 경험이 부족한 새 임금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권신이 될 수도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덕분에 부패했지만 나이도 많고 왕실엔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은 하륜과 달리 이숙번은 유배를 가고 만다.
훗날 세종은
"이숙번이 안하무인격으로 권력을 휘두르기는 했어도
반역이나 불충을 꾀한 적은 없으니 공과 과가 동시에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부친인 태종이 끝내 등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위에 언급된 것처럼 정계로 복귀시켜주지는 않았다.
사실 세종의 치세에선 이숙번 같은 안하무인 타입의 신하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법.
다음은 세종이 이숙번을 평가한 말이다.
"숙번이 광패하고 거친 성격에 상감의 총애를 믿는 마음이 있어서
교만하고 방자하고 무례하여 선왕의 노여움을 산 것이지, 불충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종께서 太上王이 되어서 황희 등을 용서하실 때에도 말씀하시기를,
'숙번의 공이 매우 크다. 내가 다시 등용하고자 하나, 그 죄가 큰 까닭으로 실행하지 못하겠다' 하시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功과 죄가 서로 비긴다.', '비록 그 죄가 있더라도 공으로 덮어 준다.' 하였다.
漢나라 양혼이 재상의 아들로 교만하고 방자하고 무도하여서 원망하는 말이 있게 되자 죽이기에 이르렀는데,
오늘날로써 이것을 본다면 양혼의 죽음이 진실로 옳은 것이나, 先儒들은 죽이는 것이 지나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태종께서 이미 등용하시지 아니하신 것을 내가 어찌 다시 등용할 마음이 있겠는가."
<세종실록> 세종 20년(1438)12월7일
반면 세종은 하륜에 대해서는
"재상의 체모는 있지만 여염의 청탁까지 시간을 끌며 두루 말하곤 했다.
내 생각으로는 보전하기 어려울 것인데도 태종께서는 능히 보전하시었다."며
이숙번에 비해 평가를 매우 짜게 내렸다.
하륜의 말년을 보면 늙어서 판단력이 떨어졌는지 말실수를 여러 번 해서 태종에게서 경고를 여러 번 받았고
탐욕이 매우 컸는데,
세종은 전성기의 하륜은 본 적 없고 이런 삽질 + 탐욕꾼 모습의 하륜밖에 모르기에
세종이 느끼는 인상에서는 평가가 박해진 걸지도 모른다.
거기에다 충녕대군 시절 태종이 민무구를 숙청하면서
‘세자 외에는 영특한 아들이 없는 것이 낫다는 말은 왕자들을 제거하려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하륜에게 처벌을 물었는데,
하륜은 "세자를 제거하려 한 게 아니고 왕자를 제거하려 한 것이므로 그 죄가 크지 않다"고 주장했다가
태종으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다.
당시 왕자였던 세종 입장에선 마음에 들 리가 만무할 것이다.
4. 기타[편집]
이숙번의 아내는 서원부부인 청주 정씨로 조선 개국 1등공신 정총(1358 ~ 1397)의 딸이다.
정총은 1376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1395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숙번의 자식들과 자손들에 대한 기록이 안성 이씨 족보에 적혀있어서 그의 후손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이숙번의 장남 이정이 세종 5년인 1423년에 進士로서 護軍에 이르렀고, 아들 네 명[5]을 낳았으며 대를 이었다.
참고로 제11, 12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 이태구가 이숙번의 직계 16대손이다.
흑역사가 있다.
이숙번에게는 소비라는 이름의 여노비가 있었는데,
이숙번이 당시 15살인 소비와 간통하려 하자 소비가 이를 거부하다 이숙번의 이마를 칼로 찌른 일이 있었다.
같이 보고된 다른 사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던
황희, 맹사성, 허조, 노한, 안순, 신상, 최사강, 조계생, 김익정, 권도, 김맹성, 정연, 박신생, 황보인 등의 관료들은
이 사건에 대해서만은 만장일치로 소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간통이라고 된 이유는 소비가 (역시 노비인) 남편이 있는 유부녀였기 때문이다.
소비의 죄를 다른 관료들이 용서할 수 있다고 한 이유도
비록 노비지만 남편이 있는 여자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다가 일어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소비는 무죄로 방면되고,
이숙번에게 부부가 해코지를 당할 것을 우려하여 다른 관료의 사노비로 보내졌다고 전해진다.
묘는 옛 안산군의 영역인 경기도 시흥시 산현동에 있다.
[1] 개국공신 정총(鄭摠)의 딸.
[2] 태종도 왕자의 난을 일으킨 점 때문에 무관 출신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3] 안산군의 지방관.
[4] 이 정도면 당시로서는 상당히 장수한 나이다.
[5] 선무(仙茂), 선예(仙裔), 중근(重根), 중신(重新)
[6]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이방간 역.
2차 왕자의 난에서 이숙번이 자기 군사들을 상대로 무쌍을 펼치자 놀랐던 모습이 나온 걸 생각하면 실로 재밌는 부분.
[7] 그래도 한번 더 만회할 기회를 주려하는 태종의 뜻을 거절하며
은퇴후 낚시나 같이 다니자 했는데 그렇게 할 수 없게되었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간다.
[8] 작중 여흥부원군 민제를 연기한 박지일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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